한밤중에 다시 열린 유가 100달러 시대
3월 중순 글로벌 시장은 몇 번을 읽어도 믿기 어려운 숫자들로 가득합니다.
브렌트유 근월물이 100달러를 다시 넘어섰고,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90달러 중후반까지 치솟았습니다.
불과 연초까지만 해도 60달러대 초반에 머물던 유가가 한 분기 만에 40달러 이상 튀어 오른 셈입니다. 시장에 충격을 가져다준 방아쇠는 이란 새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의 첫 공개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취임 직후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계속해 적을 압박하겠다”는 취지의 강경 발언을 쏟아냈고, 여기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습, 이란 혁명수비대의 역내 보복 공격이 이어지며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전면 폐쇄 상태에 가까워졌다는 평가가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실제로 에너지 컨설팅업체 크플러의 집계에 따르면 미·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일주일 만에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유조선 통행량이 약 90% 감소했습니다.
블룸버그는 최근 며칠간 해협을 통과한 선박이 이란 관련 유조선과 중국 소유 벌크선 두 척에 불과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시장 입장에서 이는 단순한 단기 뉴스가 아닙니다. 전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약 20%, 즉 하루 2,100만 배럴 이상이 지나가는 해협이 장기간 제 기능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가 가격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란은 한발 더 나아가 유럽과 아랍 국가들에게 “미국과 이스라엘 외교관을 추방하면 해협 통과를 허용하겠다”는 외교적 압박까지 내놓으며 사태를 국제 정치 레벨로 끌어올렸습니다.
IEA의 역대 최대 비축유 방출도 못 막은 공포
공급 충격이 현실화되자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역사상 최대 규모인 4억 배럴 전략비축유 방출을 결정했습니다. 이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방출 규모의 두 배에 달하는 물량으로, G7이 주도해 32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동의한 조치였습니다.
방출은 각 회원국 상황에 따라 하루 300만~500만 배럴 페이스로 시장에 공급될 것으로 예상됐으며, 일부에서는 총 12억 배럴 규모의 비상 비축유 전체를 동원하는 더 극단적인 시나리오도 논의됐습니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비축유 방출 소식이 나오기 전후로 브렌트유는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하며 100달러를 재돌파했고, WTI도 95달러를 넘어섰습니다.
3월 9일에는 장중 브렌트유가 배럴당 119달러를 넘기는 장면도 연출됐습니다. 정책 대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어도 “장기 봉쇄 시나리오를 완전히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시장이 판단했다는 의미입니다.
비축유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하루 2천만 배럴 이상의 공급이 사실상 차단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월가가 본 최악의 그림 — 브렌트 150달러, 최악엔 200달러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시나리오 분석표를 다시 꺼내들고 있습니다. 평시에는 보고서 뒷부분에만 적어두던 “브렌트 150달러”급 시나리오가 다시 본문으로 올라오는 중입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투자자 노트에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흐름이 정상화되지 않을 경우 이달 말 브렌트유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일부 하우스는 완전 봉쇄 시 200달러까지도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과도한 숫자로 들릴 수 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브렌트가 147달러까지 갔던 전례가 있다는 점을 시장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유가가 이 레벨까지 간다는 것은 단순히 에너지 섹터의 호황이나 정유사 정제마진 개선 문제가 아닙니다. 제조업 원가 구조 전체가 흔들리고, 소비 여력이 줄어들며, 결국 성장과 인플레이션의 조합 자체가 바뀝니다. 스태그플레이션, 즉 성장 둔화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투자자들이 다시 입에 올리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반세기 만에 비슷한 구도가 반복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시장 전체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나스닥이 1.78% 밀린 진짜 이유
유가 급등은 곧바로 자산시장 전반의 조정으로 이어졌습니다. 3월 12일 뉴욕증시에서 S&P 500은 1.52% 하락했고, 나스닥 종합은 1.78% 급락했습니다. 다우지수는 1.56% 빠지면서 올해 처음으로 4만 7,000선을 내주고 연저점을 새로 썼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란발 전쟁 장기화 우려가 커지고 유가가 100달러를 넘으면서 투자 심리가 얼어붙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 복잡한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유가가 오르면 물가는 다시 위로 자극을 받고, 그러면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시점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금리 인하가 늦어지면 높은 할인율이 유지되면서 성장주의 밸류에이션에는 재차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미국의 3월 CPI 발표를 앞두고 시장은 이미 긴장 모드에 돌입해 있으며, 유가 상승이 전기·가스요금, 물류비, 식료품 가격까지 순차적으로 끌어올리는 경로를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락 폭은 에너지보다 성장주에서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AI와 반도체 랠리를 주도하던 나스닥이 1%대 후반 조정을 받는 동안, 이미 일부 디스카운트를 받고 있던 밸류 섹터들은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좋았습니다.
한국 시장에 닥친 역대급 트리플 쇼크
한국 시장은 중동 리스크의 2차 피해자이자 가장 민감한 테스트베드가 되고 있습니다. 3월 초 이란 사태가 본격화되자 코스피는 이틀 만에 12% 급락하면서 시가총액 800조 원이 증발했습니다.
코스닥은 하루에 14% 가까이 곤두박질치며 1,000선을 내줬습니다. 환율은 장중 1,500원을 터치했고, 금리와 유가, 주가가 동시에 요동치는 트리플 쇼크가 현실화됐습니다.
유가가 처음 100달러를 넘었을 때인 3월 9일, 코스피는 장 초반에만 6% 넘게 밀리며 5,200선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이후 저가 매수와 프로그램 매매가 엇갈리며 하루에도 수백 포인트씩 출렁이는 고강도 변동성이 연속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과 기관이 동시에 현·선물에서 매도를 쏟아내며 인덱스 전체를 눌렀고, 개인이 양 시장에서 동시 순매수를 시도했지만 낙폭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인 양상이 반복됐습니다.
한국처럼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고 수출 비중이 큰 경제에서는 유가와 환율이 동시에 움직일 때 충격이 증폭됩니다. 유가 10% 상승이 국내 물가를 0.1~0.2%p 추가로 압박하는 구조에서, 이번 40% 이상의 유가 급등은 기업 수익성과 가계 실질구매력 모두에 상당한 타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에너지와 원자재에 쏠리는 피난 자금
극심한 변동성 속에서도 수급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 섹터가 있습니다. 정유, 석유화학, 조선, 해운, 비료, 일부 원자재 관련주입니다. 유가가 90달러를 넘어 100달러에 진입하고 디젤·가솔린·난방유 가격까지 동반 랠리를 보이면서, 에너지 밸류체인에 있는 기업들에는 실적 개선 기대가 빠르게 반영되고 있습니다.
정유주는 정제마진 확대와 재고평가이익 기대가 동시에 작용하는 황금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해운과 조선은 호르무즈 봉쇄로 기존 항로가 막히면서 우회 항로 수요가 늘어나고, 중동에서 오지 못하는 물량을 대체하기 위한 LNG·원유 운반선 수요가 증가할 수 있다는 논리가 작동합니다.
비료와 농산물 관련주는 에너지 가격 상승이 곧 생산비 상승과 공급 차질 우려로 이어지면서 순환매의 단골 수혜 섹터로 부각됩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단순한 단기 트레이딩 기회인지, 아니면 에너지 슈퍼사이클의 전조인지가 관건입니다. 이를 가르는 열쇠는 결국 이란 사태의 지속 기간과 비축유 방출의 실질 효과입니다.
반대로 유가에 얻어맞는 섹터들
항공, 자동차, 화학 중 다운스트림, 유통, 내수 소비주는 이번 유가 쇼크의 직격탄을 맞고 있습니다.
항공은 전체 비용에서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30~35%에 달하기 때문에 유가 급등은 수익성을 직접적으로 무너뜨립니다.
자동차와 유통은 물류비 상승과 소비 위축이 동시에 부담이 되고, 제조업 전반은 원재료와 전력비 상승이 수익성을 압박하는 구조입니다.
이 구간에서 투자자들이 반드시 체크해야 할 기준은 “원가 상승을 가격에 전가할 수 있는 기업인가”입니다. 브랜드 파워, 시장 지배력, 독점적 지위 같은 요소들이 단순 밸류에이션 지표보다 더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가 쇼크 국면에서는 같은 업종 내에서도 가격 전가력이 있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주가 궤적이 극명하게 갈리며, 이 구분이 이후 몇 분기의 실적 격차로 이어집니다.
엔비디아와 호르무즈 해협을 잇는 보이지 않는 선
이번 사태를 단지 에너지와 전통 섹터 이야기로만 보면 중요한 한 축을 놓치게 됩니다. AI 시대의 심장으로 불리는 엔비디아와 TSMC 같은 반도체 기업들도 호르무즈라는 좁은 수로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AI 데이터센터의 대부분은 엔비디아 GPU를 기반으로 구축되고 있고, 이 칩의 생산은 대만 TSMC와 일부 아시아 파운드리에 집중돼 있습니다.
대만과 한국은 전력 생산의 상당 부분을 수입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중 의미 있는 비중이 중동과 호르무즈를 경유합니다.
호르무즈 봉쇄가 장기화되면 원유와 LNG 가격이 올라갈 뿐 아니라, 운임과 보험료까지 동반 상승해 동아시아 전력 비용 구조 전체가 재편될 수 있습니다.
AI 연산은 전기와 냉각 없이는 단 한 클러스터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유가와 가스 가격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고착되면, 데이터센터를 새로 짓는 CAPEX뿐 아니라 이미 돌아가고 있는 AI 클러스터의 OPEX도 재계산해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엔비디아의 기술적 해자는 여전히 견고하지만, 에너지와 지정학이라는 간접 리스크가 밸류에이션 할인 요인으로 다시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 역시 이 구도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전력 비용 상승이 HBM과 파운드리 사업의 수익성 계산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애플과 구글의 동맹 — AI 칩 전쟁의 또 다른 축
유가 쇼크와 거의 맞물려 AI 패권 전쟁의 지형도 다시 그려지고 있습니다. 애플은 차세대 아이폰과 시리에 탑재될 AI 기능을 구글의 제미나이 모델과 TPU 인프라를 기반으로 구현하는 방안을 공식화했습니다.
구글 클라우드와의 계약이 발표된 직후 알파벳의 시가총액은 4조 달러를 돌파했고, 애플은 자체 모델 개발이 완료되기 전까지 구글과의 동맹을 통해 AI 전환 속도를 높이겠다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이 구조에서 애플은 하드웨어와 OS, 프리미엄 유저 베이스를 제공하고, 구글은 클라우드와 TPU, 제미나이를 제공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와 함께 클라우드와 오피스, 윈도우 생태계를 엮고 있으며, 엔비디아는 GPU와 소프트웨어 스택으로 이 모든 인프라의 하드웨어 기반을 깔아주고 있습니다.
AI 생태계는 점점 세 갈래로 갈라지는 모습입니다. AI 하드웨어 중심의 엔비디아 축, AI 클라우드와 TPU를 쥔 구글과 애플의 동맹 축, 그리고 소프트웨어와 생산성 도구에 AI를 녹여 넣는 마이크로소프트·오라클·세일즈포스 같은 소프트웨어 거물 축입니다. 이번 유가 쇼크와 호르무즈 봉쇄 리스크는 이 세 갈래 모두에게 에너지와 지정학이라는 공통 변수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스포칼립스 — 소프트웨어 종말론이 쏘아올린 공포
유가 100달러 쇼크와 거의 동시에 시장을 뒤흔든 또 하나의 대형 스토리가 있습니다. 바로 ‘사스포칼립스(SaaSpocalypse)’라는 이름이 붙은 소프트웨어 주식 폭락입니다.
2026년 2월 초, AI 에이전트와 자동화 기술이 폭발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월가는 “AI가 기존 SaaS를 대체할 것”이라는 극단적 시나리오를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단 이틀 만에 글로벌 소프트웨어 주식에서 2,850억 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했다는 추정이 나왔고, 미국 소프트웨어 ETF인 IGV는 6개월 사이 19% 하락했습니다.
같은 기간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는 40% 이상 상승하면서 AI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디커플링이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개별 종목을 보면 SAP, 서비스나우, 세일즈포스, 허브스팟, 애틀라시안 같은 대표 SaaS 기업들이 연초 대비 20~40% 하락했습니다.
시장의 내러티브는 단순했습니다. 기업들이 수십 개의 SaaS를 동시에 구독하는 대신 AI 에이전트와 사내 LLM을 도입하면, 좌석당 과금 기반의 구독료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특히 자연어 기반 AI 에이전트의 등장은 사용자가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익히지 않아도 텍스트 명령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미 일부 핀테크와 빅테크에서 대규모 SaaS 해지와 자체 AI 스택 전환 사례가 등장하자, “SaaS 시대는 저물고 AI 에이전트 시대가 온다”는 과격한 표현까지 나왔습니다.
AI가 출현 초기에는 소프트웨어를 보조하는 ‘코파일럿’ 역할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데이터 분석부터 코드 작성, 보고서 생성, 고객 응대까지 핵심 업무를 직접 수행하는 ‘자율 실행자(Agentic AI)’로 진화했다는 것이 공포의 본질입니다.
SaaS 위기론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소프트웨어 거물들
그러나 사스포칼립스는 분명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위기론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소프트웨어 거물들의 움직임이 이미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코파일럿을 오피스 전 제품군에 탑재하며 “AI가 오히려 구독료를 올릴 수 있는 기능”으로 작동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AI 기능을 제거할 경우 생산성이 오히려 급감한다는 체감 효과를 심어주는 방식으로 고객 잠금(lock-in)을 강화하는 전략입니다.
서비스나우와 세일즈포스는 IT 워크플로우와 CRM에 에이전틱 AI를 심어 기존 고객의 이탈을 막는 동시에, 새로운 고가 플랜을 출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세일즈포스의 마크 베니오프 CEO는 공개석상에서 “미래의 고객은 사람과 AI 에이전트를 함께 관리하게 될 것”이라며, 줄어드는 인간 좌석을 AI 에이전트 매출로 대체하겠다는 전략을 분명히 했습니다.
과금 체계도 직원 수 기반에서 대화 수, 처리 건수 등 사용량·성과 기반 모델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어도비는 생성형 이미지와 영상 편집 기능을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 구독에 포함시키며 AI를 공격적으로 흡수하는 중입니다.
국내에서도 더존비즈온이 사스포칼립스 공포 속에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습니다. 회계와 세무, ERP 데이터라는 깊은 도메인 해자와 규제·보안 요구 사항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구조 덕분입니다.
이런 기업들은 단순한 소프트웨어 코드가 아니라, 수십 년간 축적된 데이터와 프로세스, 그리고 고객의 신뢰를 함께 팝니다. AI가 대체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세 가지의 결합입니다.
AI 시대에 살아남는 SaaS의 조건
최근 심층 분석 리포트들을 종합해 보면, AI 시대에 살아남는 SaaS의 조건은 네 가지로 수렴합니다. 첫째는 범용 기능이 아니라 산업이나 업무별로 깊이 들어간 버티컬 SaaS일 것입니다. 법률, 의료, 회계, 제조처럼 도메인 특수성이 높은 영역일수록 범용 AI가 즉시 대체하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좌석당 과금이 아니라 사용량과 성과 기반 과금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AI 에이전트 시대에는 사용자 수가 아니라 처리된 업무량과 비즈니스 성과가 가치의 기준이 됩니다. 셋째는 기업의 핵심 데이터를 쥐고 있으면서 보안과 컴플라이언스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데이터가 곧 해자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사 서비스 안에 AI와 에이전트 기능을 깊숙이 내재화해 “AI에 먹히기 전에 AI를 흡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상위 소프트웨어 거물들은 오히려 이번 조정을 계기로 경쟁사와의 격차를 더 벌릴 가능성이 큽니다. 위기 국면에서 고객은 검증되지 않은 스타트업 솔루션보다 오랜 파트너에게 더 깊이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것이 선두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오히려 강화하는 역설을 만들어냅니다.
반대로 기능 중복이 많고 진입장벽이 낮은 범용 SaaS는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의 파고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인터넷·게임·클라우드 기업에 던지는 질문
글로벌 SaaS와 소프트웨어 섹터가 이렇게 요동치는 가운데, 한국의 인터넷·게임·클라우드·기업용 소프트웨어 기업들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비즈니스가 단순 도구인지, 아니면 데이터와 도메인 지식을 쥔 필수 인프라인지에 따라 리레이팅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국내 클라우드 ERP, 그룹웨어, 보안 솔루션 기업은 고객사 데이터와 업무 프로세스를 깊게 쥐고 있습니다. 이들이 AI 기능을 내재화하고 성과 기반 요금 모델을 설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글로벌 사스포칼립스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높습니다. 반면 기능이 중복되고 진입장벽이 낮은 범용 협업툴이나 마케팅툴은 이미 해외에서 30~40% 조정을 겪고 있는 카테고리와 비슷한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AI가 이 회사를 대체하는가”가 아니라 “이 회사가 AI를 활용해 고객의 필수 인프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의 답이 앞으로 3~5년의 리레이팅 방향을 결정합니다.
지금 시장이 보내는 신호와 투자자가 봐야 할 것들
지금 시장은 두 개의 거대한 파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호르무즈 봉쇄와 유가 100달러 재돌파가 불러온 에너지와 인플레이션의 파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AI와 에이전트 기술이 SaaS와 소프트웨어 비즈니스 모델을 통째로 재평가하게 만드는 디지털 전환의 파도입니다. 두 파도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에너지 비용이 AI 인프라 OPEX를 직격한다는 교차점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앞으로 투자자가 체크해야 할 포인트는 명확합니다.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 사이의 군사·외교 이벤트와 호르무즈 해협 상황이 완화될 조짐을 보이는지, IEA의 대규모 비축유 방출이 실제 수급 구조를 얼마나 완충하는지, 유가가 100달러 위에서 자리를 잡는지 아니면 90달러대로 다시 내려오는지, 그리고 미국의 3월 CPI와 이후 지표들이 연준의 금리 인하 시나리오를 어떻게 바꾸는지입니다.
동시에 AI와 SaaS 전선에서는 어떤 소프트웨어 기업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있는지, 누가 여전히 좌석당 과금과 범용 기능에 의존하고 있는지, 어떤 기업이 데이터와 도메인 해자를 더 두껍게 쌓아가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엔비디아·TSMC,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AI 인프라 핵심 기업들의 투자 계획과 전력 비용 구조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장은 늘 과장과 과소평가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조적 기회와 영구적인 손상이 동시에 만들어집니다. 지금의 유가 쇼크와 사스포칼립스는 단기 변동성을 넘어 앞으로 3년, 5년짜리 투자 지형을 다시 그리는 신호일 가능성이 큽니다. 흔들리는 시장 속에서 살아남는 투자자는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를 읽는 사람입니다.
본 글은 개인적인 분석과 의견을 담고 있으며,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과 그에 따른 결과는 투자자 본인의 책임이며, 제시된 수치와 전망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투자 전 반드시 추가적인 조사를 권장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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